8년 전 쯤, 돌아가신 아빠의 묘를 옮기기 위해 온 가족이 한식날 모였었다. 엄마가 손이 없는 날 묘를 옮겨야 하는데 그 때가 한식이라고 하셨다.

한식날은 손 없는 날 또는 귀신이 꼼짝 않는 날로 여겨 산소에 손을 대도 탈이 없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산소에 개사초(改莎草 : 잔디를 새로 입힘)를 하거나 비석 또는 상석을 세우거나 이장을 한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라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사람들이 식목일 날 음식을 해서 동네 산에 올라가서 절을 하고 내려오는 일이 많았다. 그 때는 한식날인지 몰라서 그냥 그 집에서 제사를 하나보다하고 생각 했던 기억이 난다.

 

 

곧 다가올 “한식”날에 관해 알아보자.

 

 


 

 

√ 한식(寒食) 이란?

 

동지(冬至) 이후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는 45일 무렵이다.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 중 하나이다. 일정 기간 불의 사용을 금하며 찬 음식을 먹는 고대 중국의 풍습에서 시작되었다.

한식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명절이 아니다. 따라서 한식은 음력 2월에 있을 수도 있고, 음력 3월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2월 한식과 3월 한식을 구분하는 관념이 있다. 그래서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좋고 따뜻하다고 여기며, 3월에 한식이 있으면 지역에 따라서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

 

 

 

 

 

√ 한식에 하는 일

 

한국에서 한식이 언제부터 명절로 여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문종 24(1070) 한식과 연등 날짜가 겹치므로 연등을 다른 날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늦어도 고려 전기에는 한식이 중요한 명절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식에는 금화(禁火)와 성묘의 풍습, 투란(鬪卵 : 계란 위에 누가 그림을 더 잘 그리는지를 겨루는 유희) 놀이가 있었으며, 소나기가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도 한식은 중요한 명절로 지켜졌다. 한식을 주제로 한 많은 시가 전해지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식에는 금화( 한식날 부엌에 불 때는 일을 금한다)와 개화(궁중과 지방의 각 관아에서 보관하던 불씨를 새로 갈아주다)가 행해졌다. 세종 13(1431)에 한식 사흘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왕실에서는 종묘 제향을 지냈고, 종묘에서 제외되었거나 후손이 없는 왕과 비빈 등에 대해서는 성묘를 했다. 허물어진 능묘를 보수하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절사(節祀)라 하여 산소로 올라가 성묘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식과 추석이 가장 성하여 교외로 향하는 길에 인적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한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명절로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특별한 행사 없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불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은 거의 사라졌다.

 

예전에는 한식의 날씨를 살펴서 그 해 시절의 좋고 나쁨이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곧 한식에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하면 시절이 좋거나 풍년이 든다고 하며, 어촌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폭풍이 불고 큰 비가 내리면 그 반대라고 믿었으며 한식날 새벽 천둥이 치면 서리가 일찍 오고 저녁에 치면 서리가 늦게 온다고 전해지지기도 한다.

 

 

 

 

√ 한식에 먹는 음식

 

 

한식날에는 쑥으로 만든 쑥떡이나 쑥단자 등을 먹거나 꽃잎이 예쁘게 올라간 화전을 즐겼다.

그리고 옛날에는 불의 사용을 금했기 때문에 찬밥 또는 찬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한식의 의미가 예전과 달리 많이 퇴색되어 현대인들에게 한식이라는 명절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4대 명절 중의 하나인 한식날 가족 또는 친지간의 정을 나누는 안부 인사를 하고,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도록 건강을 기원하는 말을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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